♡간암으로 쓰러졌다고 상간녀가 전화했길래
"건강한 사람은 건강의
고마움을 알지 못한다."
[토마스 풀러]의 말입니다.
우리는 건강을 무기로
세상을 상대로 싸우고
자신의 생각과 싸우며
삶을 만들어 갑니다.
건강은 삶을 만드는 제일
기본적인 관리 대상인데
늘 잊어버리고 살지요.
제 남편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건강 검진 한번 안 받고
병원은 멀리 하는 게 좋다
내가 얼마나 건강한데
자신하다 어느 날 쓰러졌고
병원에 갔는데 그땐 이미 늦었죠.
남편을 보내고 느낀 건
돈 많이 벌고 멋지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강하게 잘 사는 게
최고의 행복이구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잘 살다 가기 위해
건강을 챙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고
가족에 대해 잘 알게 되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남편을 영화 촬영팀에서
일하는 친구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저는 여의도에서 부모님
식당을 돕고 있었는데
촬영팀에서 일하던 고향 친구가
좋은 사람이라며 소개를 해줬죠.
부모님도 마음에 들어 하셨고요.
부모님 식당을 물려받아야 했기에
멀리 떠날 수 없는 형편이었는데
그런 면에서 남편은 다행인 사람이었죠.
고향을 떠나와 여의도에서
살고 있었거든요.
부모님 식당엔 영화 촬영팀이
자주 올 수밖에 없었고요.
남편과 3년 좀 모자란
사귐 후에 결혼했습니다.
시댁은 시골에서 농사 짓고
계시는 좋은 분들이셨고요.
명절 외에 자주 찾아뵙지 못해도
식당 일하니 그렇지 하고 이해해 주셨죠.
좋은 거 보내드리고
늘 안부 전화 드리고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게 죄송해서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남편은 늘 밖에서 지냈어요.
지방 촬영 가면 한 달 이상
얼굴 못 볼 때도 있었고요.
남편은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저한테만 그런 걸 나중에
그 이유를 알고 기가 찼지만
결혼 초기에야 그런 생각을
할 틈이나 있겠어요.
그저 좋아서 떨어져 지내면
보고 싶다는 생각 밖에 안 하죠.
시댁에 잘하면 그때만
저를 안아주고 칭찬해주고
고마워할 줄 알았지.
대화도 별로 없었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다음 촬영 일정 나올 때까지 두어 달
쉴 때는 시댁에 다녀온다며
가서는 오지 않았고
팀과 술 마시러 다니기 바빴습니다.
혼자 하던 생활에 익숙해 있었죠.
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첫 아들일 때 잠시 아이를 예뻐하긴 했지만
둘째부터는 바쁘다는 이유로
제대로 봐주지 않더군요.
"당신 너무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바빠도 애들 얼굴 제대로
봐주는 게 뭐 어렵다고 무심하냐고.
둘째 제대로 안아 준 게 언제야?
진짜 너무한다 너무해."
"거의 밖에서 고생하며
지내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이야말로
내 생각은 안 하는 거지.
나 피곤하고 힘들어
애들은 당신이 알아서 키워."
그렇게 무뚝뚝하고
정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실한 거 보고 결혼했다가
재미없는 결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친정엄마가 아이를 돌봐 주셨고
제가 본격적으로 식당 일을
맡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도 연세가 있으시니
힘들어 하셨죠. 직원을 더 구해서
제가 운영을 하게 되었기에
돈 관리도 다 제가 했습니다.
그때부터 남편은 월급을
생활비라며 조금 내주고
돈 잘 버니까 안 줘도 되지? 하더니
시부모님 도와드리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런 줄 알았죠.
그 돈은 시부모님을 드린 게
아니더라고요.
용돈을 보내드린 건 맞는데
남편이 말한 금액을
다 보내드린 건 아니었어요.
촬영 다니다 만난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거죠.
돈은 그 여자 만나느라 쓴 거고요.
촬영팀에 있으면서
제 남편을 소개해 준 친구가
남편이 바람 피우는 걸 보게 됐고
저에게 알려주더군요.
그런 사람 소개해서 미안하다고요.
결혼 7년 만에 알게 된 남편의 첫 바람은
제가 알고 나서 석 달 뒤 정리했다고
다신 안 만난다며 용서를 구했고
아이들 생각해 저도 넘어갔네요
그깟 각서가 뭐라고
각서 한 장 받고 말이지요.
한동안 제 눈치를 보긴 했지만
그 놈의 바람이
안 피우는 사람과 한 번 피우는
사람은 없다로 나눈다고
그 말은 딱 맞더군요.
남편은 결혼 23년 동안
총 네 번의 바람을 피웠습니다.
제가 안 것만 그거지 더 피웠겠죠.
마지막 바람은 간암을
알기 전에 피운 바람인데
평소와 같은 바람이 아니라
두 집 살림이었습니다.
세 번의 바람으로 이미 말도
안 하고 지내고 있었는데
촬영이 끝나도 집에 오지 않더군요.
대놓고 집에 오기 싫다는 말도 했고요.
애들이 크고 있어서
내가 참고 살면 되는 거다.
애들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버티자 했던 것 같네요.
딸이 결혼할 때까지 버텨야 하나
별 생각을 다 하면서
남편의 바람을 참아냈네요.
여자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며느리와 엄마만 남은 저에게
식당일 외엔 힘이 되지 않았고요.
아이들도 크니까 부모 일은 부모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더군요.
아들은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완전히 멀어져 버렸죠.
아버지는 없는 사람이다 생각했습니다.
아들이 대학교에 입학한
그 해 봄에 남편은 두 집 살림하는
여자의 집에서 쓰러졌습니다.
병원에 갔다는 그 여자의 연락을 받고
달려갔을 땐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군요.
이렇게 될 동안 뭐 했느냐
이미 알았을 텐데
왜 병원에 안 왔느냐 하셨죠.
그 여자는 주저앉아 엉엉 울었고
저와 같이 간 고등학생 딸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 여자를 보고 있었습니다.
"우린 그만 가볼게요.
앞으로 병시중도 알아서 하시고
당신 남편 챙기세요.
그 집에서 쓰러졌는데
제가 할 일은 없는 것 같네요.
연락하지 마세요. 그럼..."
"당신... 남편이잖아요.
아픈 사람을 두고 어떻게 그냥 가세요?
저한테 병시중을 하라뇨?
제가 왜 저 사람 병시중을 해요?
가족이 있는데 할 이유가 없죠.
몸과 마음이 당신한테 있는데
제가 왜요?"
"당신 남편이죠.
저 남편 얼굴 본 거 1년 전이에요.
아들 대학 입학 때도 안 왔어요.
무슨 남편이요?
저는 책임 안 질 거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이혼 안 하고 있었던 건
우리 애들 결혼하면
헤어지자 버틴 것 뿐인데
그것도 이제 하기 싫어졌네요.
그러니 남이나 마찬가지인
사람 챙길 생각 없으니까
버리던 챙기던 알아서 하세요.'
그 여자는 제 얼굴 한번 보고
제 딸 얼굴 한번 보고 황당하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번갈아 보더군요.
저는 그 얼굴을 무시하고
병원을 나와 버렸습니다.
딸도 눈치가 보였는지
저를 따라왔고요.
집에 와서 아들과 딸한테
아버지 보러 병원 가는 건 알아서 해라.
나는 안 간다 했습니다.
"니들 일은 니들이 알아서 해
공부하는 건 부모로서
해줘야 할 일이지만
니들 인생에 이래라
저래라 하고 싶진 않다
호진이는 전부터
엄마 말은 무시하니까
앞으로 일은 니가 알아서 해
대학 마칠 때까지
등록금과 생활비는 줄게
그리고 내일부터
방 알아보고 독립해라.
보증금 정도는 해 주마.
혜연이는 아직 고등학생이니까
옆에 두겠지만 대학교 가면 너도 독립하고..
내가 남편 복도 없더니
자식 힘들게 키워놔도
자식 복도 없네 다 내 탓이겠지
참고 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자식한테 기대하는 것도 없으니
우리도 이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힘들게 하지 말자
니들 대학 갈 동안만
니들 결혼할 때까지만 했는데...
니 아버지 몇 달 못 살고 죽는 다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니
이젠 각자 알아서 살자 꾸나
둘 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비용 대주고 그 이후는 줄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 살아
이제부터 나도 나를 챙기면서 살련다.
인생 참 허무하네."
아들과 딸이 제 말에
많이 놀라긴 했지만
저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더는 남편도 없었고
자식도 없었죠.
뭘 위해 지금까지 버텼나
후회만 남더군요.
사는 동안 애들이라도
잘 키우자 싶어서 해달라는 거
다 해주면서
아빠가 없는 자리 허전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
결론은 아빠가 바람 피운 건
엄마 탓이라며
제 탓을 하는 두 자식한테
서운한 마음만 생겼죠.
남편이 깨어났는지 전화가 왔습니다.
병원에 왜 안 오느냐
큰 소리를 치길래 한마디 했습니다.
"인간아 언제 정신 차릴래?
내가 어떻게 당신 아내야?
아내는 거기 있잖아.
그 여자한테 챙겨달라고 해.
나는 거기 갈 일 없어."
"그 여자 여기 없어.
전화도 안 받아.
당신이 내 아내지
그 여자가 내 아내냐
빨리 와! 아픈 남편을 혼자 두냐
여기 다들 간병인의 보호자가 있는데
나만 없어 얼른 와!"
"법적으로 부부면 다 부부니?
당신 몸도 마음도 다 밖에 있었는데
무슨 부부?
거기 갈 생각도 없고
당신이 죽었다고 해도
장례 치러 줄 생각 없으니까 찾지 마
당신한테 나는 그저
애들 엄마고 며느리였지
아내였던 적 없잖아
이젠 나도 내 인생 살 거니까
당신은 당신 마지막이나
잘 정리해 남은 시간 얼마 없는데
나랑 보내야 되겠어?
다시 여자 찾아 보던가
아니면 늙으신 부모님
연락해서 오시라고 하던가 해
당신은 늘 나를 남으로 대했는데
왜 나는 안 되는데?
전화 와도 안 받을 거니까
몸이나 잘 챙겨."
"당신 정말 이러기야?
이러면 안 되지
그럼 누가 날 돌봐.
부모님께 이런 모습 어떻게 보여?
제발 당신이 와서 해줘.
아니면 한 번만 와주라.
우리 얼굴 보고 이야기 좀 하자."
남편이 간곡히 부탁해서
그래 한 번은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생각해서 가서 만났습니다.
입원실에 혼자 덩그러니 있더군요.
다른 사람들은 다 보호자나
간병인이 있는데
쓸쓸하게 혼자 누워있더군요.
저를 보자 반가워 웃는데
꼴도 보기 싫었습니다.
1년에 한 번 보는 얼굴 뭐가 반갑겠어요.
두 집 살림하던 남편이 아프다는 데
보살피고 싶을까요?
"우리가 얼굴 보고
할 이야기가 있던가.
왜 귀찮게 오라 가라 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결혼 23년이야.
아무리 내가 미워도 아픈 사람을
이렇게 방치해?
얼마 못 산다고 하더라
그러니 그때까지 나 챙겨 알았지?"
"미친 소리를 참 정성스럽게 하네
챙기긴 누굴 챙겨
내가 왜 당신을 챙겨 지금까지
당신이 알아서 살았으면
살아있는 동안에도 그렇게 살아
아프다고 달라질 것 같아?
없던 정도 생겨?
사랑은 밖에서 다 퍼주고
남은 찌꺼기는 내가 가져라? 미쳤어?
내가 왜 그 짓을 해?
몇 달 못 산다고 하잖아
좋아하는 사람과 보내
나 말고 다른 여자랑 사셔
애들도 독립시키고 이제부터
내 인생 살려고 하니까
방해하지 말고
어차피 내 인생에서
당신은 언제나 없었어
나 혼자 두 애 키우고
생활하고 그랬지
당신은 바람 피우면서
다른 여자한테 좋은 일 시켰잖아
그럼 남은 시간도 그렇게 해
난 당신 찌꺼기 아놔 여기 있다
던져 주는 거 받기 싫어
그거 받아서 어디에 쓰게?
연락하지 마
장례식엔 당신 자식들은 보낼게
당신 너무하는 거 아니야?
몇 달 못 산다고 하잖아."
"그럼 가는 길은 봐줘야지.
내가 아무리 바람 피우고
밖으로 돌았다고 해도
마지막 가는 길이잖아.
젊은 나이에 생 마감하는
내 생각은 안 해줘?
나 죽기 싫다고!
더 살고 싶다고!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니?
바람 피운 거 너 때문이라는
생각은 안 드냐?
무슨 재미가 있어야 말이지
맨날 식당 일만 하고
돈만 벌 줄 알았지
애교가 있어?
뭐가 있어?
그래서 밖으로 돌았다 왜!
나 아직 당신 남편이라고 알아?"
"그깟 서류 이혼하면 끝이야
이혼하자
이제라도 이혼하고 싶네
당신이랑 사별 말고
이혼하고 싶어
내일 서류 가지고 올게
죽기 전에 이혼하자.
그게 좋겠어 알았지?"
남편의 숨 넘어가는 욕을 뒤로 하
저는 병실을 나왔습니다.
나오는 뒤로 입원한 다른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남편이 바람 피워서
버림 받았다는 것에 대해 흉을 보더군요.
바람 피웠으니 당연하다고 하면서 말이죠.
벌 받아서 암 걸려 죽는 것
같다는 말도 들려 오더군요.
제가 딱 하고 싶었던 말이었죠.
죽는 날을 기다리는 남편한테
차마 하지 못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 말을 욕과 함께 하고 싶었는데
몇 달 있으면 죽는 사람한테
할 수가 없었죠.
병원을 나와 잠시 걷는데
하늘이 참 맑더군요.
오랜만에 보는 하늘이었습니다.
하늘도 못 보고 살았구나
생각하니까 남편이 아니라
제가 불쌍해 보였네요.
여행도 가본 적 없고 가까운 곳에
나들이도 못 가보고 산 세월이 생각나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들이야 지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줬으니
원망 들을 일은 아빠가 바람 피워서
못 보고 산 것 외에는 없었죠.
그것 말고는 딱히 저한테
원망 안 하더라고요.
돈 아쉬운 것도 없고
해보고 싶은 거
여행도 다 하면서 산
자식들 이니까요.
돈 버느라 그걸 해보지 못하고
산 제가 바보였던 거죠.
식당으로 가는 길에 여행사에 들러
제주도 여행을 예약했습니다.
처음으로 가는 여행이라
너무 설레더군요.
남편 일은 다 잊고
자식 일도 다 잊고
부모님과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정말 좋아하셨어요.
바쁘게 사는 딸을 보며
식당 물려준 거 늘 후회하셨거든요.
괜찮다고 말씀드리면서
돈 많이 벌었고
그래서 자식들 가난으로
고생하지 않게 잘 키울 수 있었는데
후회 같은 거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있다면 제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 뿐이라고 했고요.
일주일 동안 식당은 직원들에게
맡겨두고 다녀왔습니다.
아들과 딸 일도 잊고
친정 부모님과 맛있는 거 먹으면서
편안하게 지내다 왔습니다.
이래서 여행을 가는구나 싶었죠.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고요.
여행에서 돌아오니
딸이 아빠가 수없이
연락했다고 말해줬습니다.
제가 남편 전화도
애들 전화도 안 받았거든요.
딸이 진짜 아빠 안 돌볼 거냐고 묻길래
딸로서 네가 하고 싶으면 해라
그 대신 나한테
아내 노릇 하라고 하지 말아라
난 네 아빠한테
아내 대우 받은 적 없다 했습니다.
딸은 아무 말 안 하더라고요.
이해한다고 하면서
엄마가 우리 키우느라
고생한 거 안다
아빠가 생활비 준 적도 없고
엄마 혼자 고생한 거 다 안다.
그래서 고마운데
아빠가 죽는다고 하니까
엄마가 챙길 줄 알았다고 하길래
전혀 그럴 생각 없다고 했습니다.
이후 딸은 한마디도 지 아빠
이야기 안 했고요.
아들은 독립해서 집 나갔으니
대화할 일은 더 없었고
군대 가겠다고 연락해왔고
친구들이랑 갈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통화한 게 다입니다.
면회도 안 갑니다.
오지 말라고 하더군요.
아들 입대 후 남편은 사망해서
장래에 아들이 나오긴 했지만
한마디 대화도 하지 않고 보냈네요.
아들은 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멀어지더군요.
지 아빠 닮아 가는 아들이 꼴도
보기 싫었던 것 같네요.
남편 장례에도 가고 싶지 않았지만
마지막 배려로 갔습니다.
시어머니의 부탁도 있었고요.
늘 자식 대신 미안해 하시던
시어머니 마음에 짐을 덜어 데리고
싶어서 장례에는 갔습니다.
남의 장례 치루듯 치렀고요.
눈물도 안 났습니다.
병원에서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고
하면서 보호자를 찾았는데
어머니가 손녀와 대신 가셨습니다..
딸은 가더라고요.
별말은 없었고 편지 한 장을 주더군요.
거기엔 미안했다는 말과
고마웠다는 말이 적혀있었고
자신의 안타까운 삶을 아쉬워하는
후회의 말만 몇 마디 적혀있었습니다.
가는 마지막까지 자신만
사랑하다 간 사람이었네요.
장례 후 친정 부모님과
여행을 두 번 더 다녀왔고
딸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독립시켰습니다.
나가지 않고 저와 살겠다고
하는 걸 거절했습니다.
나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했죠.
집은 이사했습니다.
친정 부모님과 가까이에
살고 싶어서 이사했죠.
남동생이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어서
고마움에 올케한테
좋은 외제차 한 대 사줬습니다.
고맙다고 하면서 당연한 걸 하는데
한 게 뭐 있어서 이런 걸
받느냐 울더라고요.
선물하면서 뿌듯하긴 처음이었네요.
남인 올케도 저한테 차 선물 받고
고마워하는데
평생 키워주고 입혀주고
먹여 준 아들한테 고맙다는 말
한 번 들어본 적 없었네요.
딸은 지 아빠 입원하고
난 후 처음 들어봤고요.
지금 왕래 없이 지내고 있어요.
오겠다고 하지만 제가 거절하고 있어요
편하게 알아서 잘 살라고 했죠.
서운해 하지만 서운해 할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다 컸으니 니 인생 아니겠느냐
공부 마치면 돈 보낼 생각도 없으니
그때부턴 취업해서
알아서 살라고 했고요.
그러겠다고 하더군요.
얼마 전 올케와 남동생을
유럽으로 여행 보냈더니
신혼여행 가는 것 같다고
하면서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부모님 내가 챙길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했죠.
시부모 모시고 사는
올케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요즘은 올케와 부모님
챙기는 재미로 삽니다.
같이 놀러 다니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그동안 못해본 거 다 하면서 삽니다.
나한테 잘하는 사람한테
더 잘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닐지요.
자식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니니까
공부 마칠 동안은
최선을 다해 도와야겠지요.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그렇게 하려고요.
이후는 성인이 된 자신들의 몫이죠.
말은 이렇게 해도 아들과 딸에게 주려고
아파트 두 채 사뒀습니다.
결혼하면 명의 이전 해주려고 해요.
그것까진 할 생각입니다.
죽을 때 돈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요.
그동안 번 돈 부모님께 쓰고
부모님 모시고 사는 남동생과
올케한테 쓰면서 살려고 합니다.
행복이 뭐 별건 가요.
가족인 사람들과
가족으로 지내면 되는 거죠.
늘 남이었고
가족이 아니었던 남편은 밖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았으니
오히려 불행했을 것 같네요.
행복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늘 사는 게 불만이었고
하는 것마다 불만이
가득한 사람이었죠.
그렇게 살다 간 사람입니다.
진정한 가족이 무엇인지
자식 키우며 부부가
투닥거리는 것이 무엇인지
부모님과 여행을 가는
재미가 어떤 것인지
형제들에게 무얼 해줘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못 느끼고
간 남편이 불쌍하네요.
아파서 죽은 게
불쌍한 게 아니고요.
아마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아팠을 것 같네요.
늘 불행하다고 입으로 말하고
다닌 사람이니까요.
저한테 너무 차갑고 냉정하다고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여러 번 기회를 줬고
그래도 남편이고
애들 아빠라 참고 버텼는데
그건 더 불행한 거더라고요.
저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죠.
지금 저는 너무 행복해서 행복합니다.
진정한 내 가족들과
재미나게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요?
원수 같은 가족도 있겠지만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고
아껴 주는 가족도 있답니다.
행복한 인생은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 잊지 마시고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 끝 -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사연입니다.
멋진 인생을 응원합니다.
♧오늘의 인사
♣자신을 먼저 챙기세요.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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