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영업 일을 하면서
매일 술을 마셨고,
제가 시어머니 병시중 하느라
떨어져 있던 2년 동안 더 몸을
챙기지 않고 지냈더군요.
한 달에 한번 정도 봤고,
명절이나 볼 수 있었는데,
결혼 5년 만에 남편의 몸은
망가지고 있었죠.
시어머니를 집으로
다시 모셔 갈 수도 없었습니다.
시댁이 더 넓었고
우리 집에 모셔 갔는데
답답하다고 하셔서
다시 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시댁에 와 있기로 했고
남편은 돈을 벌어야 했죠.
시아버지가 도와주시는 건
아무것도 없었네요.
그러다 남편이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간암말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이
그 당시 제 심정을 두고 하는 말 같았죠.
남편 병시중 하는 동안
시동생도 시누이도 찾아오지 않아서
시어머니께 간병인을 뒀고요.
남편은 6개월 뒤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슬펐지만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네요.
아이도 없고 남편도 죽은 마당에
왜 시어머니 병시중 하느냐며,
젊은 나이를 안타까워하시던
친정아버지 손에 끌려
친정으로 가야만 했고요.
시아버지 전화가 수십 통
걸려 와도 받을 수 없었죠.
시동생과 시누이가 있어도
안 왔던 사정을 잘 알기에
걱정으로 지냈습니다.
엄마인데 잘 모시겠지
생각하고 잊고 지낸 1년.
시어머니의 문자가 한통
찍혀있었습니다.
며칠 있으면 요양병원에 가신다고
한 번만 볼 수 있느냐 하셨습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찾아뵈었죠.
몸은 더 마르셨고 눈은 휑하니
볼품없는 모습으로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이게 다....
제대로 못 드신 거예요?
살은 왜 이렇게 빠지신 건데요?"
"우리 연희 왔네. 나 괜찮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너 없으니까 밥맛도 없고
돌 씹는 것 같아서 잘 안 먹어서
살이 조금 빠지긴 했는데...
그래도 몸은 괜찮아.
오히려 더 가벼워.
그래 어떻게 지냈누.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
"오고 싶었는데 친정아버지가
더 가는 것도
죄짓는 거라고 하셔서...
죄송해요..."
"괜찮아.
우리 연희 마음 다 아는 걸.
너를 5년을 봤어.
우리 지형이 보낼 때
고생 많이 했다는 말도 들었다.
가 보지도 못하고 미안하구나.
오늘 너 보자고 한 건
나 요양병원에 가면
이젠 나오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저기 서랍 좀 열어 보거라."
어머니가 열어 보라고 하신
서랍엔 하얀 봉투가 하나 들어있었고
안을 들여다보니 명함 한 장과
메모지 한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이거 가지고 이 명함에
있는 사람 찾아가 봐.
이 주소에 있는 땅,
연희 네 앞으로 해 주실 거야.
여긴 내 친정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아무도 없어.
시골 땅이지만 근처에
펜션이 많아서
조금 올랐다고 하더구나.
전에 우리 지형이 입원했을 때
팔려고 물어보니까
돈이 안된다고
더 가지고 있으라고 했어.
그래서 못 팔았지.
연희가 더 가지고 있어.
몇 년 지나면 펜션이나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올 것
같다고 하더구나. 내 선물이다.
줄게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하다.
여기는 아무도 몰라.
친정 부모님 돌아가시고,
동생이 내 앞으로 했지.
시골 땅이라 아무도 관심 없고 말이야.
많이 올랐다고 하니까
가지고 있다가 너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할 때 보태. 알았지?"
"어머니. 이걸 제가 어떻게 받아요?
제가 뭐 한 게 있다고 이걸 받아요?"
"지형이 죽고....
넌 내 며느리이기 전에
딸이나 마찬가지야.
처음 왔을 때부터 어머니 하면서,
콧소리 내며 내 허리 잡고 따라다녔지.
해본 적도 없는 살림살이 하겠다고
너 그 허연손으로 찬물에
손 담그는 거 보면서,
미안하면서 얼마나 예뻤는지 몰라.
고생한다고 못하게 해도
어머니도 하시잖아요? 하는데 눈물이 나더구나.
넌 내 딸보다 더 내 딸이야.
더 오래 보고 싶은데.
이젠 지형이가 보고 싶어.
내 아들 지형이 보러 빨리 가고 싶네.
병원에 좀 있다가 갔으면 한다.
오래 있고 싶지 않아.
너무 고단하네.
고마웠다. 우리 지형이도
많이 고마워할 거야.
건강 잘 챙기고 항상 몸 조심해.
너 결혼하는 거 멀리서 라도
소식 들려 다오. 기다리마."
"어머니. 오래 사셔야죠.
왜 그리 서운한 말씀을 하세요.
제가 요양원으로 자주 찾아뵐게요.
마음 약한 말씀 하지 마세요."
저는 시어머니가 주신 명함을
받아 주소지로 찾아갔습니다.
어머님의 친정 친척 분이셨죠.
그분이 데려가신 곳은
시내 변호사 사무실이었고,
같은 고향 분이라
동네 일을 다 아시더군요.
연락받고 기다리고 계셨다고 하셨고,
제가 가지고 간 서류를
받으시더니 알아서 해 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하셨네요.
저는 어머니 친척 분을 따라
시골집을 가 봤습니다.
어머니 친정 집이 있었던
자리는 엄청 넓은 땅이었고
주변 경치도 너무 좋았습니다.
펜션이 많은 이유를 알겠더군요.
집 앞으로 조금 걸어가면
흐르는 유명한 강을 보며
여기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머니 부탁으로 저는 그 땅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친정에도 말하지 않았고요.
보름이 지나 어머니가 가셨다는
요양 병원으로 가서 뵈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워하시던지요.
보름 전보다 더 안 좋아 보이셨는데,
담당 의사 선생님 말씀이
어머니가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빨리 떠나길 원하셔서
걱정이라고 하시더군요.
아무리 부탁을 드려도
어머니는 회복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식사를 거의 안 하셨거든요.
시동생이나 시누이는
첫날 왔다 간 게 다라고 했고,
아버님은 하루에 한 번
다녀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요양 병원에
모신 것 같았죠.
아버님도 많이 늙으셨고
보는 제 마음이 참 무거웠네요.
남편이 살아있으면
잘 모셨을 텐데 생각하니까
더 눈물이 났습니다.
제가 바쁜 일이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 가려 던 걸
못 가고 열흘 만에 찾아뵈었는데,
그날이 마지막으로 뵙는 날이
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틀 뒤 돌아가셨다고
전화를 받았거든요.
음식을 거부하셨고,
아버님께 주사도 놓지 말아 달라고
간절하게 애원하셨더군요.
장례식에서 며느리가 저렇게
우는 건 처음 봤다고 사람들이
말할 정도로 울었던 것 같습니다.
효도도 제대로 못했고,
아들 먼저 보내고 그 목숨값으로
산 거라고 힘들어하셨던 어머니 셨기에,
제 눈물은 남편과 어머니를 보내며
그리움에 더 울었습니다.
장례 이후 아버님을
찾아뵙진 않았습니다.
오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더군요.
저 보면 아들도 생각나고
어머님도 생각난다고 하시면서,
안 보고 살자, 서로 잘 지낼 거라고
생각하며 살자 부탁하셨습니다.
이후 저는 친정아버지께
어머니께 받은 땅에 대해
말씀드렸고,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펜션 사업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같이 가보자고 하셔서
모시고 갔습니다.
그곳 풍경을 보시더니
아버지도 퇴직하고
이런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몇 채 지어서 같이 살자 하시더군요.
그래서 2년 동안 그 주변
을 다 정리하고 펜션 세 채와
우리가 살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사했죠.
이후 코시국도 지냈고
여러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 펜션에 오시는 분들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네 시어머니 덕분에
우리가 호강한다,
이런 경치를 주시고 가셨네 하시면서
최고의 선물이라고 늘 말씀하세요.
땅값은 그리 많이 오른 건 아닙니다.
돈과 바꿀 수 없는
어머니의 마음이 여기 있다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저에게 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죽은 남편 잊고 이런 거 보면서
치유하라는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아니셨을까 생각합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잘 살고 있어요.
결혼 소식은 금방 전하지 못할 것 같아요.
결혼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부모님과 잘 지내고 있어요.
어머니... 여보....
그곳에서 편히 쉬길 바라요.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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