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새 인생을 응원한 며느리
안녕하세요.
서울에 살고 시댁이
경북에 감이 많은 동네인
'하미연'이라고 합니다.
저는 시어머니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해요.
결혼한 이후 시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보면서
저는 절대로 시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 결심도 했지만,
어머니의 나머지 인생은
행복하게 사셨으면 하는 마음에
이 사연을 함께 해 봅니다.
저는 지인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연애 2년 후 결혼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다 보니
서둘러하게 되었죠.
시댁은 농사를 많이 지으셨고
감 농장으로 가을이 되면
주말을 온통 감 따는
일꾼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농사에 농자도 모르던 제가
즐겁게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시어머니 때문이었죠.
아무리 힘들어도 웃으시면서
저를 반갑게 맞아 주셨고,
좋은 거 먹이려고 애쓰셨으며
당신 아들보다 농사도 모르는데
애쓴다고 하시면서,
바리바리 싸서 주시면서
너 혼자 챙겨 먹으라고
하신 분이십니다.
어머니 아들 먹이라고
주시는 거 아니고요?
제가 웃으면서 말하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 자식은 이미 많이 무따.
니나 마이 무라.
이제 시골 음식 안 좋다 칸다.
니는 이런 거 안 묵어 봤제?
건강에 좋다 아이가.
전에 왔을 때도 니가
잘 묵길래 내가 챙겨놨다.
니만 무라."
"그럴게요 어머니,
이 나물 정말 맛있더라고요.
친정 엄마는 음식 솜씨가
별로 셔서 이런 거 안 해주셨어요.
어머니 음식은 진짜 맛있어요.
깊은 맛이 있어요.
제가 배워 볼게요.
어머니 솜씨는
못 따라가겠지만 말이죠."
어머니는 저에게
늘 다정한 분이셨죠.
가을 감 따기가 끝나면
받은 감 값에서 용돈도 주셨고요.
평소엔 시어머니께
돈을 잘 안 주시는 시아버지가
가을 농사가 끝나면 필요한 거 사라고
백만 원을 주신다고 하시면서
쓸데가 없다고 이제부턴
너를 주마 하시면서 저를 주셨습니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꽤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모르신다고 하시면서
돈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해라 하셨고요.
결혼할 때 아버님이 결혼 비용은
보태 주셨습니다.
늦은 나이에 결혼한 우리 부부는
이미 각자 집이 있어서
평수가 좀 더 넓은 제 명의의
집에서 신혼을 시작했고
남편이 살던 아파트는 월세를 놨고
저축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어머니께 용돈을 드리면 안 쓰시고
다 모아 두시는 걸 알게 된 건
어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셔 와서
저에게 그간 모은 돈이라며 주시던
통장 내역을 보고 알게 되었죠.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알뜰하고 열심히 사는 분이셨죠.
그런 어머니가 마음고생이 심하셨고,
시아버지의 주먹질을 참고 사신 걸
우연히 알게 되었고 저는 분노했습니다.
남편은 전혀 몰랐다고 했습니다.
대학교 입학하면서 서울로 올라왔고
이후 집에 잘 내려가지 않아
전혀 몰랐다고 했습니다.
명절에나 겨우 갔고 해외 근무를
한 적도 있어서 알 수가
없었던 것이었죠.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참고 사셨던 것이고요.
남편도 어머니가 맞고 사신 걸
확인한 후 아버님과 크게 다퉜고
연 끊고 지내자고 할 정도로
분노하고 왔으니
정말 몰랐던 것이 맞았습니다.
저도 제대로 알게 된 건
결혼 2년이 지나 임신을 하게 되었고
어머니가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서울 우리 집으로
오셔서 이틀 계시고 내려가셨는데
그때 어머니가 아버님의 전화를 받고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말도 제대로 못 하시면서
힘들어하시던 모습에서
수상한 것을 느꼈습니다.
이후 이부자리를 펴 드리고
허리가 아프다고 하셔서
파스를 붙여드리려고
옷을 올리고 허리를 보는 순간
입을 벌리고 놀라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등이 온통 멍으로 덮여있더군요.
"어머니, 이게 무슨.....
이 멍이 다 뭐예요?"
"놀라지 마라.
일하다 넘어져서 다친기다.
걱정할 거 엄따.
파스 주고 니는 나가봐라.
놀라지 말고. 다 괘안타.
농사짓다 보므는 다치고 그란다.
아이고 눈물이 마나가지고 우야노.
야야 괜찮타 카이, 이리 우노.
조심한다고 한기 이래 됐다.
내가 조심하꾸마. 됐제?"
"어머니...."
"큰 아 한테는 말하지 말그래이?
걱정한다 아이가.
내가 더 조심 하꾸마.
니도 걱정할 필요 엄따."
어머니는 하룻밤 주무시고
다음 날 내려가셨습니다.
기차역까지 모셔다 드렸는데
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죠.
약국에서 사 온 약도 다 챙겨 드렸고,
택배로 건강식품도 주문해서 보냈으니
잘 챙겨 드시라고 말씀드렸고요.
어머니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밝게 웃으시면서 내려가셨습니다.
2주 뒤 우리 부부는 청도에
내려갈 일이 생겨 시댁으로 갔습니다.
집안 결혼식이 있어 참석도 할 겸
남편이 친구들과 모임이 있다고 해서
겸사겸사 내려갔죠.
시부모님을 모시고 결혼식에 다녀온 후
남편은 친구들 모임에 참석하러 갔고,
아버님도 한잔하고
들어오신다고 마실 가셨죠.
저는 어머님과 저녁 식사 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제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습니다.
어머님은 거실에서 아버님
양말을 꿰매고 계셨고요.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안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잠에서 깨서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 앞으로 갔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어머님을
부르려는 순간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어머님의 손을 막고 내뱉는
욱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버님의 목소리가 뒤따랐고요.
"니 또 내 말 안 듣고 돈 썼나?
이런 거는 안 써도 된다 안 캤나!
돈 좀 아끼라.
뭐 이런 걸로
낭비하느냔 말이다.
맞고 싶어 이라나?
제발 정신 좀 차리라.
돈 어디서 그냥 안 나온다
몇 번이나 내 말했나 말이다.
알았제?"
"예. 알았심더.
퍼뜩 주무시이소.
잘못 했심더...."
어머니가 일어나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고
아버님은 술에 취하셨는지
조용히 나가라며
어머님께 한 소리 하시더니
주무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조용히 뒷걸음쳐서
방으로 돌아왔고
어머님이 작은방으로 가서
문을 닫는 소리에
눈물이 나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으면 어머니께 확인을 해보고
남편과 의논해야겠다고 생각했고요.
남편은 열두 시가 넘어 들어왔고
술을 마셨는지 곧장
깊은 잠에 빠져버렸죠.
작은방 앞으로 가
어머니께 가봐야 하나
몇 번을 망설이며
서 있었네요.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난 후
아버님과 어머님이
창고 앞에 서 계신 걸 봤고,
아버님이 어머님 정강이를 차고
계신 걸 멀리서 봤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동네 어르신이 문을 열고
들어오시자 아버님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나가셨거든요.
저는 어머님께 달려가
손을 잡고 거실로
그동안 일을 여쭤 봤습니다.
"어머니, 저 다 봤어요.
어머님 등에 그 멍들....
넘어져서 생긴 거 아니죠?
어젯밤에도 아버님이 술 마시고
오셔서 어머니 때리셨잖아요.
그리고 아침에도 어머니
정강이 차는 거 봤어요.
그동안 아버님이 어머니를
때리신 거죠?"
"니 다 봤나? 우야노....
그래 맞다.
니 시아버지는 평생 저리
나를 때맀다 아이가.
아들 생각해서 참고 살았제.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이가.
친정은 가난하제.
여서 나간다고 뭐 먹고
살 방법도 딱히 없는데
우얄끼고 참고 살아야제.
니가 보기엔 등신 같것지만.
자식 낳고 살믄 그냥 살게 된다.
니가 모른 척했다고.
니들 결혼하고 이젠
때리지 마시소 해봤지만
안 달라지신다 우짤끼고
내가 참고 살아야제."
"두 아들 뒀다 뭐 하시게요?
자식 아껴서 뭐 하실 건데요?
힘들다고 이런 게 사셨다고
도움을 요청하셨어야죠.
두 아들 다 컸고 결혼해서 사는데
지금도 이렇게 사시면 안 되는 거죠.
아버님은 안 달라지실 거라고요.
자식들 다 나가 사니
얼마나 더 괴롭히실까요.
화풀이를 다 어머니께
하시는 것 같네요.
습관이 무섭다고
어머니가 받아 주시니까 만만해서
더 그러시는 거라고요.
이제 멈추게 하셔야 돼요.
어머니가 마음 정하시면
제가 도와 드릴게요.
같이 사실 이유 없으시잖아요.
어머니가 아버님 좋아해서
사시겠다면 제가 막진 못하겠지만,
두 분 그냥 자식 낳고 살아서
정으로 사시는 것 같아요.
어머님이 아버님 근처에
가시는 것도 못 봤고,
식사하실 때도 멀찌감치 계셔서
뭐가 불편하신 건가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네요.
이제라도 어머니
인생 사셔요.
저희들 손자 손녀 낳고
잘 사는 거 보셔야죠.
이렇게 맞고 사시면.
언제 어떻게 되실지도 모르는데
이젠 어머니가 멈추세요.
용서하지 마시고요.
어머니도 귀한 딸이잖아요."
어머니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심한 듯이 저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눈물이 맺혔고
목이 매여 한참을
머뭇거리시더니 말씀하셨죠.
"자식들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그랬제.
나하나 참으면 다 편할낀데
싶어서 말이다.
니 말 들어보니 다 맞다.
진즉 내가 집을 나가던가
결판을 내야 했는데
자식들 생각해서 참은 기다.
니 시아버지 내가 집 나간다
카믄 난리 날낀데..."
"그런 거 왜 걱정하세요?
이제 어머니만 생각하세요.
아셨죠? 우선 저희랑
같이 올라가세요.
짐 가방 미리 싸 두시고요.
저는 남편 깨워서
지금 가자고 할게요."
어머니는 짐 가방을 싸셨고
저는 남편을 깨웠습니다.
갑자기 깨우니 남편이
많이 놀라더군요.
일어난 남편을 끌고
안방으로 가 어머니 등을
보여 줬네요.
남편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머니를 한참 쳐다보더군요.
어머니는 눈물만 흘리셨고요.
"어머니... 이게....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아버지가 이런 거예요?
세상에....
평생 이러고 사신 걸
저하고 도성이한테
한마디도 안 하신 거예요?
우리가 어머니한테 잘했다
고맙다 하실 줄 아셨어요?
왜 불효를 하게 만드셨어요?
밖에 나가 살아도
자식은 자식이잖아요.
그리고 세월이 흘렀으면
말씀을 하시고 방법을
찾으셨어야죠.
왜 맞고 사세요?
이러다 큰 탈 나시면
어쩌시려고요!
안 그래도 아버지 행동이
갈수록 거칠어지신다 생각했어요.
연세 드실수록 더 험해지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요.
오히려 기운이 없어지셔야죠.
이건 뭐.... 해도 해도 너무 하시네요."
"미안하구나 도진아.
도성이는 몰랐으면 싶은데 말 할끼가?
너보다 마음이 여리가 감당 안 될 끼다.
니만 알고 있으면 안 되겠나?
엄마가 무식해서 그란다 아이가.
그래도 니들 다 컸으니까
뭐 아쉬울 것도 인자 엄따.
니 아부지 걱정은 안 한다.
할끼 뭐 있노.
술 자시면 그게
제일 좋은 양반인데.
돈 있고 술 있고 그라믄
잘 살 양반이다 아이가."
"지금도 아버지 걱정이 되세요?
왜 이러고 사셨어요?"
'당신은 어머니 탓 하지 마시고요.
어머니는 뭐 참고 살고 싶으셨겠어요?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어머님 모시고
집을 떠나는 게 먼저예요.
어머니 짐 가방 챙기고 얼른 가요.
일단 우리 집으로 모시고 가자고요.
아버님 돌아오시기 전에 가요."
우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정든 집을 떠나는
어머니 얼굴엔 온갖 감정이
다 들어있었습니다.
다시는 못 돌아가실 걸
아신 듯했습니다.
자식들 키우며 산 집인데
한편으로는 남편한테
평생을 맞고 산 집이어서 인지
시원섭섭해하셨네요.
차 안에서 집을 한번
돌아보시더니 잘 있어라
내 이제 몬 온다 이러셨거든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운전한 남편은 오는 내내
허탈한 웃음과 함께
화를 내고 있었죠.
어머니에 대해 몰랐던
자신을 미워하는 한숨이었고요.
제가 몇 번이나 다 괜찮을 거라고
어머니 손을 잡고
위로하는 말을 들으면서,
남편이 더 한숨을
내쉬었던 것 같네요.
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차 한잔 했는데
맑게 웃으시던 어머니 얼굴에서
평온함이 묻어나 더 안타까웠습니다.
서울에 도착해 짐을 풀고 있을 때
아버님의 전화가 어머니가 아니
남편에게 울렸습니다.
남편은 전화를 받아
조용히 말하고 있었고요.
"니들 지금 어디에 있냐?
니 엄마도 안 보이고
차도 없는데 벌써 간 게냐?"
"네. 어머니 모시고 서울로 왔어요.
아버지..... 왜 그러셨어요?
어머니 몸에 온통 멍이더라고요.
왜 어머니를....
그래서 모시고 왔어요.
어머니 안 내려가실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냐?
이제 안 내려 온다니?
사람이 살다 맞고 살기도
하고 그런 것이다.
니 엄마가 좀 답답한 사람이냐?
속이 터져서 그랬다.
그런다고 안 내려오면
농사는 누가 지어!
얼른 내려 보내라!"
"아버지!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세요?
자식 낳고 키우고 살림하고
같이 농사지으면서 고생한 아내를
답답하다고 때려요?
어머니가 안 하신 게 뭐가 있어요?
배로 일하신 분이세요.
그래도 투정 한 번 안 하셨고요.
어머니 병원도 다니셔야 하고
당분간 아무 스트레스도
드리고 싶지 않아요.
전화 안 받으실 거니까
어머니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어머니 전화기 제가 가지고 있어요.
그렇게 아세요."
남편의 통화에 어머니가
많이 놀라셨습니다.
당신 아들의 어깨를
다독거리시더군요.
저는 식사 준비를 했고
남편은 어머니와
대화를 하고 있었죠.
어머니의 울음도 들렸습니다.
가슴이 아팠죠.
다음 날 저는 하루 휴가를 내고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받고
의사 선생님께 진료를 받으면서
저는 야단을 많이 들었네요.
어떻게 어머니가 이렇게 되실 때까지
모를 수가 있느냐고 말이죠.
어머니는 의사 선생님께
우리 며느리는 아무것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아느냐
야단치지 마세요 라며
제 편을 들어주셨고요.
팔을 잘 못 움직이셨을 텐데
어떻게 농사를 지으셨느냐
속상한 말투로 말씀하셨죠.
수술을 해야 한다고도 하셨고요.
입원 날짜를 잡고 입원해서
수술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회전근개 증후군으로 치료를 하지 않고
방치하면 염증이 악화되거나
만성적으로 근육이 퇴행하거나
파열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수술로 치유될 수 있다고 하셨죠.
입원 기간도 짧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하셨고요.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의논한 후
어머니 입원 날짜를 병원을 통해
지정받았고 며칠 뒤 입원하셨죠.
그동안 아버님은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입원하셔서
수술을 하신 후 5일 뒤에
퇴원하셨네요.
여러 가지 검사도 더 받으셨는데,
전에 골절도 있으셨고
성한 몸이 아니셨습니다.
당분간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하기로 하고 퇴원하셨고요.
다행히 큰 병은 없으셔서
안심은 되었습니다.
대부분 농사짓다 다치신 경우였는데
아버님이 돈이 아깝다고
의사들은 다 큰 병이라고 한다며
약만 사주시고 치료를 안 해주셔서
생긴 병이었습니다.
남편이 제 전화를 받고
많이 화를 냈고요.
아버님과 일절 통화하지 말라고 하면서
제 전화기에 아버님 전화번호
차단하라고 부탁도 하더군요.
알아서 하겠다고 했죠.
어머님 몸 회복이 먼저라
좋은 음식으로 식사를 준비했고
건강식품도 어머님께 필요한
제품으로 주문도 했네요.
우리 집에 오신 지 한 달이 지나갈 무렵
어머님은 살도 조금 찌셨고,
건강한 모습으로 아파트 근처 공원에
운동도 다니셨죠.
보기 좋았습니다.
잘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고요.
어머니 삶을 제가 이렇다 저렇다
간섭하고 충고할 수는 없겠지만,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 같아
어머니를 취미 학원에도
모셔다 드렸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어르신들과
수다도 떠시면서 점점 밝아지시고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죠.
어머니고 늘 저에게 고맙다고 하셨고요.
제가 임신으로 배가 불러오는 것도
보시면서 '손주 낳으면
내가 키워 주마'하시는데
말씀 만으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친정 엄마가 시어머니께서
와 계신 걸 아시고 좋은 거
잔뜩 사서 오셨고
가끔 오셔서 쇼핑도 가시고
나들이도 가시면서 두 분이
친구처럼 지내기도 하세요.
열살 아래지만 속 깊은
친정 엄마 덕분에 출근 이후에
안심하고 일할 수 있었죠.
엄마도 걱정하지 말고 일해라
시어머니 챙겨 드리마 해주셨습니다.
지금도 두 분은 너무
다정하게 잘 지내세요.
"사돈, 대단한 분이시더구나.
그 많은 농사를 어찌 짓고 사셨을까.
마음이 안 좋은 게 말이다.
그 많은 농사를 짓고 감을 따서
팔아도 가을에 겨우
백만 원 주셨다는구나.
연 매출이 얼마나 되시느냐
여쭈어봤는데 정확히는 모르고
돈은 많으실 거라고 하더라.
생활비도 두 아들이 보내는 것도
있으셔서 얼마 안 쓰셨대.
바깥사돈 술값으로 나간 게
더 많다는구나.
어찌 그리하셨을까
난 이해가 안 돼.
고생한 아내를 제일 먼저 챙겨야지
술집 가서 아줌마들
챙긴다는 게 말이 되니?
지금 연세에도 팁을 주신다고 했어.
사람은 안 변해.
변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데 변하겠니?
네 어머니께 신경 쓰고 잘해드려.
효도하고 욕먹는 건 없다.
우리 딸은 잘할 거야.
박 서방도 잘하잖니.
서로 아끼면서 잘 살면 돼.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 것도 아니고
그런다고 행복하지 않아.
마음이 편해야지.
너희 부부는 다투지 말고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잘 살아.
이제 손주도 낳을 건데 더 잘해야지.
알았지? 나도 가끔 네 시어머니랑
데이트도 하고 그럴게."
"고마워 엄마.
엄마 덕분에 내가 한시름 놨어.
우리 어머니 잘 부탁해요.
나도 엄마한테 잘해야지
생각이 드네.
엄마 미안해.
효도 제대로 못해서.
아빠가 워낙 엄마를
사랑하셔서 잘 챙기시니까,
내가 뭐 해 드릴 게 있어야 말이지.
엄마는 남편 잘 만났고
아빠는 아내 잘 만난 거지.
두 분 금실은 인정합니다."
친정 부모님을 보면서
부부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고 배웠는데
시부모님이 사신 걸 보면
어머님의 희생으로 쌓아 올린
탑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아버님은 술 드시는 시간이 더 많았고
농사의 대부분을 아버님이 아닌
어머님이 다니셨더군요.
일꾼을 불러오고 함께
고생을 하고 일궈 놓은 농사는
어머니의 피와 땀이 더 많았죠.
아버님은 대부분 말로 때우셨고,
돈으로 다 관리를 하신 거였죠.
돈 가진 사람의 파워가
그 사람이 대단해
보이게 만든 것이고요.
동네에서도 어머니가
얼마나 일꾼이신지 다 아시더군요.
그런 분을 돈도 조금 주시고
때렸다는 것에 화가 났습니다.
몇 달이 지나도 아버님은
전화도 없었고 오시지도 않았죠.
남편은 변호사를 통해
이혼 소송을 진행했고
재산분할 신청도 같이 했습니다.
어머니의 노력이 없었다면
땅을 더 사들이고
그 많은 농사를 다 지을 수
없었을 거라는 것을
남편이 시골에 다녀왔고
동네 어르신들을 통해
다 도장을 받아왔더군요.
증거도 많았습니다.
서류는 온통 어머니 도장이었고
거래할 때마다 어머니 통장으로
돈이 들어왔는데,
관리만 아버님이
다 하신 것이었습니다.
통장 내역을 어머니를 통해
은행에서 받아왔고
아버님이 술집에서 쓰신
술값도 얼 만인지 다 알게 되었죠.
겨울만 되면 술집에서
살다시피 하셨고
돈도 많이 쓰셨더군요.
무려 3억이 넘었으니까요.
이혼 소송을 했다는 것을
소장을 받고 알게 되신 아버님이
그제야 전화를 하셨고
몇 번이나 남편과 다퉜지만,
남편은 이혼은 변함없다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부모를 그렇게 갈라놓고 싶으냐
별 말을 다 들었지만,
남편이 한 말은 어머니가
이러다 돌아가실까 봐 걱정이 되어
안 되겠다는 말이었죠.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까지
했다는 말에 아버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조용하고
들리지 않은 걸 보면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있으셨나 보다 생각했고요.
아니 미안했으면 치료하는 걸
못하게 하지 않으셨겠죠.
약만 사다 주고 병원엔
못하게 하셨다고 하셨으니
미안함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불편하셨을 뿐인 것이죠.
어머니가 그동안
다 해주셨으니까요.
이혼 소송은 오래 걸렸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어머니는 당신이 평생 고생하신
대가를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재산 12억 중에 십억을
어머니가 받으셨고
집과 땅은 아버님 앞으로
그냥 주셨습니다.
시골집 가져와서
뭐 하냐 하셨고요.
땅과 감 농장은 아버님이
계속하실 수 있게 주신 거였죠.
그 땅 값도 컸지만 어머니는
욕심을 내지 않으셨습니다.
받으신 돈은 어머니가 쓰시고
싶은 곳에 쓰시라고 했더니
그럴 일 없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
제 남편에게 가지고
있으라고 주셨고,
일부만 작은 아들한테
보내라 하셨습니다.
결혼할 때 보태주고 싶었는데,
아버님 눈치가 보여 못 줬다 하시면서
서운한 마음으로 미안해하셨죠.
저한테 통장 하나를 주셨는데
그곳엔 가을에 백만 원 받은 것과
자식들이 준 용돈과 작은 금액이 모여
평생을 모았다고 하시면서
보여 주신 통장엔 4억이란
돈이 모여있었습니다.
재산 분할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통장 이름이 어머님의 여동생
즉 이모님 앞으로 되어있었죠.
아버님께 들키지 않기 위해
이모님 통장을 빌려 모으셨더군요.
그 돈 중에 1억과 세금은
이모님께 이미 드렸고,
나머지 3억을 제게 주셨습니다.
어머님이 돈이 없어서
못 쓰신 건 아니었죠.
쓸 일이 없어서
안 쓰신 거였네요.
늘 아끼는 게 몸에 밴 분이라
함부로 돈을 쓰지 않으셨죠.
절약하며 사셨고 나중에
자식들한테 써야지 하고
모으신 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 아버님 일이 해결되면서
고마워서 저에게 주시는 거라고
손에 꼭 쥐어 주셨네요.
어머님과 좋은 곳에 가고
맛있는 거 먹을 때 쓸게요 하고
받아뒀습니다.
눈물을 흘리시는데
제가 할 말이 없었네요.
이번에 흘리시는 눈물은
편안하고 행복해서 흘리시는
눈물이었으니까요.
이혼 후 어머님은 정말
제대로 즐기면서 살고 계세요.
취미반에서 만들어 오신
작은 나무 등도
아기 방에 꾸며 주셨고
털실로 아기 옷도 뜨고 계시는데
너무 멋져서 듬뿍
칭찬도 해드렸습니다.
많이 행복해하세요.
남편이 시골에 다녀왔는데
잘 지내고 계신다고 합니다.
어머님의 빈자리는
누구도 채울 수 없겠지만
아버님은 여전히 술 드시고
동네 분들과 어울리면서
잘 지낸다고 하니
걱정할 일은 없겠네요.
남편만 명절에
시골에 다녀오기로 했고
저는 이제 가지 않고
어머니와 지내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어머니를 응원하며
이 사연 함께 해 봅니다.
부모님은 영원히
곁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자식들 생각해서 아프다
힘들다 말도 잘 못하시고요.
늘 살펴야지 생각하는데
잘 안되기도 하지요.
조금만 마음을 들여다
보시길 바랍니다.
언제 우리의 곁을
떠나실지 모르니까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저는 막달이라
건강하게 아기 낳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연 소개할 즈음엔
출산했을 수도 있겠네요.
감사합니다.